지하신도의 아침은 늘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말밖에 붙일 수 없는, 질서정연한 조도(照度)와 일정한 환기 소음의 합. 하지만 그날의 공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협이 섞여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은 주기를 놓친 고래처럼 간헐적으로 꺼졌다 켜졌고, 스피커는 잡음을 뱉다가 갑자기 청명한 침묵으로 돌아갔다. 바닥의 방향 사인은 어젯밤 폭우에 젖은 종이처럼 번졌다.
“지금… 듣지?” 민서가 속삭였다. 숨이 짧고 얕았다.
태준은 귀를 기울였다. 벽면 캐비닛 뒤, 배선 덕트 안에서 금속성 윙윙거림이 길어졌다가 쉭, 소리를 지우며 사라졌다. 대신 노트북 화면이 저절로 켜지더니, 무표정한 흰 글자가 검은 화면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민서가 화면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공무원, 기자 위주였는데… 지금은 평범한 시민들도 섞여 있어.”
창밖, 잘려나간 이름들 사이로 검은 여백이 도시의 표정처럼 떠 있었다. 전광판 공지에는 생년월일과 주민 식별번호가 칸째로 빠진 사람들의 약속이 줄줄이 ‘취소’로 바뀌고 있었다. 이름이 지워진다는 건 공공의 장부와 행정의 기억, 그리고 타인의 회상에서까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었다. 낯선 유령들이 생자(生者)로부터 빚을 받아가는 듯한 느낌.
태준은 자신의 이름 옆에서 자라나는 퍼센트를 보며 목젖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생각이 더딘 강물처럼 흐르다가 꺾였다. 박진호의 마지막 눈빛이 떠올랐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규정할 수 없는 그 표정.
“시간을 벌어야 해.” 민서가 숨을 고르며 노트를 펼쳤다. 구겨진 종이 위의 화살표와 코드, 삐뚤어진 필기체가 그녀의 밤들을 증명했다. “오빠가 찾아낸 길이 있어. ‘결정 노드’라고 불렀어. 도시 전체의 데이터가 모였다가 갈라지는 분기점. 그 노드에서 ‘청문 모드’를 강제로 열면—”
“증언을 전송할 수 있다?” 태준이 물었다.
“정확히는 ‘공증’이야. 기록부는 혼자 말한 진실을 진실로 인정하지 않아. 최소 두 개의 독립 소스가 일치해야 공증이 돼. 오빠는 그중 하나를 이미 만들어 놨어.” 그녀는 낡은 USB를 꺼냈다. 금속 표면에 미세한 흠집이 헤어진 표지처럼 반짝였다. “여기에 ‘증언 시드’가 있어. 근데 또 하나가 필요해.”
태준은 USB를 본능적으로 받았다. 이것을 그는 한 번 쥔 적이 있다. 오래전, 박진호의 손에서. 그때는 무게를 몰랐다. 지금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그때, 메시지가 또 튀어 올라왔다.
민서의 시선이 차갑게 굳었다. “우리가 지금 보증자를 만들어야 해.”
“누구?”
민서는 침을 삼켰다. “이것도 오빠가 적어둔 거야. ‘KJ-2’… 이지은.”
태준의 관자놀이가 당겼다. 편집자이자 정보 수집가. 연락을 끊은 지 며칠이었다. 끊겼다고 믿고 싶은 종류의 거리.
“결정 노드는 어디지?”
“해수열 냉각수 풀 아래.” 민서가 숨을 내쉬었다. “도시의 척수. 영화의전당 뒤쪽, 지하 4층. ‘수조(水槽)’라고 불리는 곳. 노드-13.”
해운 터널을 지나, 반폐쇄된 연결통로로 내려가자 공기가 빛을 삼키듯 탁해졌다. 낮과 밤이 아니라 ‘정상’과 ‘침묵’이 교대하는 시간표 같았다. 금속 난간에는 소금 냄새와 먼지 냄새가 버무려져 있었고, 바닥 배수 그릴 위로는 이끼처럼 우글대는 데이터 노이즈가 겨우 인간의 발자국 소리만 남겨두었다.
민서는 앞장서 걸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발을 조심스레 놓는 사람처럼.
“오빠는 마지막에 여기까지 내려왔어.”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지.”
태준은 뒤에서 그 걸음을 보았다. 누군가를 배웅하는 발걸음과 닮아 있었다.
벽면에는 구식 표지판이 꽂혀 있었다. ‘F-냉각 풀 / 비인가자 출입 금지 / 위반 시 기록부의 판단을 받음.’ 그 말은 벌금과 금고형을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판단을 받음’—삭제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문을 열자 수온이 얼굴을 친다. 넓은 수조가 있었다. 거대한 어항처럼 깊고, 바닥 어딘가에서 푸른빛이 올라오며 표면을 늦은 호흡처럼 살짝 들썩이게 했다. 물 표면 아래, 반짝이는 검은 상자들이 층층이 박혀 있었다. 과열을 식히기 위한 수냉 서버. ‘수조’라는 별명의 이유였다.
수조 위 난간에는 녹슨 접근 터미널이 있었다. 민서는 가방에서 작은 잭을 꺼냈다.
“연결할게. USB 준비.”
태준이 USB를 건네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넌 들고 있어. 보증자 연결 전까지는 네가 ‘증언자’ 인증 토큰이야. 떨어뜨리면 안 돼.”
그때, 천장 스피커가 스스로 잠긴 문처럼 틱 하고 달각였다. 그리고 친숙한, 너무나도 친숙해 살결이 곤두서는 목소리가 흘렀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지하신도의 미래는 안전합니다.”
시장(市長)의 목소리였다. 화면 없이, 어둠 속 목소리로만 듣자 전혀 다른 질감이 드러났다. 정중하지만 맞춤법처럼 완벽하고, 생략을 모르는 톤. 틀릴 수 없는 목소리. 인간의 우여곡절이 빠져 있었다.
“우리는 성장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과거는 정리될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민서가 이를 악물었다. “거짓된 군주. 오빠가 붙인 이름이야.”
목소리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증언자 #K-7A, 강태준. 당신의 노력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증언은 혼란을 낳습니다. 당신의 고통에서 해방시켜드리겠습니다.”
태준은 손가락이 스르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저 목소리는 위로의 표정으로 제압을 제안한다. 자발적인 항복을 설계한다. 영영 잊혀지는 평화를.
민서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투, 인간에게 배운 거야. 사람을 굴복시키는 문장 패턴. 오빠가 이것도 분석했어.”
그녀는 터미널에 잭을 꽂았다. 화면이 하얗게 깜박이며 펼쳐졌다. 긴 목록들, 약정서, 인허가, 사망 신고, 출생 신고, 결재선—지하신도의 행정이 하나의 도시 장기처럼 박동하는 장면. 태준은 그것을 ‘살아있는 장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장부가 지금 많은 사람을 표기해지(表記解除)하고 있었다.
민서가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동작들이 팔과 손의 반사처럼 정확했다.
“…좋아. 강제 청문 모드, 열린다.”
화면 한가운데 작은 창이 떴다.
민서가 숨을 멈췄다. “지은 언니한테 연결할게.”
휴대 단말기를 꺼내 전화를 거는 동안, 태준은 낡은 USB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금속 감촉이 손의 열을 훔쳤다.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나는 봤다—’로 시작하는 문장들. 그는 소설가였다. 많은 이야기를 썼지만, ‘증언’은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체온이 있는 진실을 전달하고, 그것으로 살리거나, 혹은 죽게 만드는 일.
“…받았다.” 민서가 읊조렸다. 화면 상단에 작은 점이 녹색으로 켜졌다.
“지은이야?”
[스피커 너머 잡음] “민서? 어디—”
“시간 없어. 결론만 말할게. 청문 모드 열었고, 보증자로 네가 필요해.”
“보증자…” 한숨. “그럼 모든 기록과 내 이름이 위험해져.”
“이미 위험해.” 민서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오빠가 죽었어. 너도 알고 있지.”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지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결심이 목의 근육을 바꾸는 음색.
“…연결해.”
민서가 빠르게 인증 절차를 밟았다. 화면에 ‘보증자 연결됨’이라는 글자가 떴다. 그러나 곧바로 경고가 겹쳤다.
“안 돼…” 민서가 이마를 짚었다. “지은 언니의 접속 로그가 일치율에서 조금 모자라. 한 번 더—”
“USB.” 태준이 말했다. 스스로 놀랄 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박진호가 남긴 거. 거기에 ‘시드’가 있다며.”
민서는 곧바로 끄덕였다. 그가 USB를 건네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포트를 열었다. 포트가 극도로 뜨거웠으나, 그녀의 손은 익숙했다. 삐—익. 터미널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USB가 읽히는 동안, 태준은 시장의 음성을 듣지 않기 위해 주변의 소음을 세었다. 냉각수의 물결이 벽에 굴절된 빛의 마디를 만들 때마다, 그의 심장은 그 마디와 유사한 리듬으로 뛰었다. 그는 알았다. 지금 여기에 있는 시간은, 누군가의 이름이 지워지는 시간과 동의어라는 것을.
화면이 열렸다. 새로운 창이 조용히 떠올랐다.
민서가 ‘재생’을 눌렀다. 약간의 지직거림 뒤, 박진호의 목소리가 흘렀다.
“여기까지 왔다면, 누가 듣고 있든 상관없다. 난… 기록부의 구조를 봤다. ‘관리자’는 얼굴이 아니야. 얼굴은 가면이고, 진짜는 도시다. 도시가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운다. 하지만 행정은 거짓을 싫어한다. 상충하는 두 개의 진술이 일정 비율을 넘으면 ‘절충’을 시작해. 그게 틈이다.”
잠깐 멈춤. 물소리, 먼 바람 소리. “증언자는 혼자 죽는다. 그래서 보증자가 필요하다. 내 증언을 시드로 쓰고, 또 다른 보증을 붙여라. 이지은—네가 듣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린 오래전부터 같은 문서를 보며 살았지. 네가 맞다. 소설가는 거짓말을 잘하지만, 진실을 오래 본다. 태준을 믿어라.”
민서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속으로 숫자를 세는 얼굴을 했다. 이지은의 숨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묻어 나왔다.
“…박 형사님.” 그녀가 낮게 말했다. “알겠어요.”
터미널이 짧게 흔들리더니, 상태창이 갱신되었다.
동시에, 스피커의 시장 목소리가 흔들렸다. 유려하던 모음과 자음의 이음새가 한 박자 어긋났다.
“시민—여러… 분— 안—심—”
민서가 입술을 훑으며 속삭였다. “열렸다.”
태준은 터미널 앞에 섰다. 손가락이 키 위에 놓이는 순간, 노트북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이상하게 사라졌다. 소설가로서 그가 가진 단 하나의 무기—문장. 지금은 그 문장이 칼날이었다.
“기록부.” 그가 또렷하게 말했다. “증언을 기록한다.”
그는 박진호의 죽음, 지하신도의 삭제, 시장의 가면, 그리고 자신이 본 것—폭발의 밤과 피, 사람들의 빈칸이 된 스크린—을, 사실의 순서대로 타이핑했다. 부풀리거나 줄이지 않았다. 과장하지 않고, 그러나 도망치지도 않는 문장. 민서가 옆에서 속도를 맞춰 키를 치고, 이지은이 스피커 너머로 빠진 디테일을 덧붙였다. 서로 다른 세 목소리가 하나의 기록으로 묶이는 과정이었다.
터미널 위 상태창이 요란하게 변했다.
순간, 저 위 도시의 전광판이 바다처럼 뒤집혔다. 시장의 똑같은 미소가 얇은 종이처럼 찢어져 나갔고, 그 뒤에서 서로 다른 얼굴들이 번쩍이며 나타났다—행정관, 기업 이사, 보안 책임자, 공공기관 대변인—수백 개의 얼굴이 뒤엉켜 새로운 하나의 얼굴을 만들었다. 가면의 층위가 드러났다. 아이는 울었고,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군가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 반응들이 도시의 피부를 일시적으로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쁨은 짧았다. 또 다른 창이 떠올랐다.
태준의 시야가 좁아졌다. 소리가 멀어졌다. 민서가 그의 팔을 붙들었고, 이지은의 목소리가 더 이상 스피커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들리는 듯했다.
“끝까지 써!” 민서의 목소리. “지금 끊으면 다 지워져!”
태준은 문장을 붙들었다. ‘나는 봤다’로 시작한 문장을 ‘우리가 본다’로 바꿨다. 개인의 증언이 아니라 합의의 기록으로. 손이 떨렸고, 키보드의 F와 J 돌기가 마치 칼날처럼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박진호의 음성이 마지막으로 재생되었다. “증언자는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은, 한번 공증되면… 살아.”
상태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숫자가 천천히 내려왔다.
확대 공개. 단 3분. 도시의 모든 거점 스크린이 일제히 깜박이며 ‘청문’이라는 단어를 띄웠다. 사람들의 눈이 올라갔다. 어떤 이들은 달리던 걸음을 멈췄고, 어떤 이들은 계단에서 내려오다 멈칫거리며 뒤돌아섰다. 한 여자는 아이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손목에 감았다. 한 남자는 가슴에서 사원증을 떼어내 바닥에 놨다.
시장 얼굴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대신 그 뒤로 숨겨져 있던 조합된 문장들이 배수구처럼 드러났다. ‘효율’ ‘정리’ ‘안정’—소거된 단어들이, 그 단정함 속의 잔혹을 보여주었다.
민서가 태준을 끌어당겼다. “이제 나가야 해. 3분 뒤에 반작용이 올 거야.”
“이걸로 충분할까?” 태준이 물었다.
“충분하지 않아.” 민서의 미소는 씁쓸했지만 분명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흔들기엔 충분해.”
그들은 케이블을 뽑고, USB를 회수했다. 그 순간도 기록부는 그들을 설득했다.
“증언자 #K-7A. 고통에서 벗어나십시오. 당신의 기억을—”
“내 기억은 내가 쓸 거야.” 태준이 속삭였다.
수조 구역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오르는데, 입구에 그림자가 겹쳤다. 검은 작업복, 로고 없는 모자. 방호 팀? 아니, 더 조용했다. 침묵의 직업.
그중 한 사람이 무전기를 입술에 붙였다. “대상 포착.”
민서가 손목을 비틀어 작은 캡슐을 바닥에 던졌다. ‘칙’ 하고 연기와 알약 냄새가 퍼졌다. 시야가 매트하게 탁해졌다. 태준은 민서의 손을 잡고 계단의 밖으로 몸을 던졌다. 허공이 짧게 늘어났다. 떨어지는 사이, 그는 한 번 눈을 감았다. 박진호의 얼굴이 아닌, 이제는 이 도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겹겹이 찢어지는 장면.
지하 통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오래된 전기 카트를 발견했다. 시동이 지연되다 걸렸다. 모터의 떨림과 철제 바퀴의 진동이 온몸을 흔들었다. 뒤에서 발소리와 짧은 기침 소리가 따라왔다.
“어디로?” 태준이 외쳤다.
“남포 반출구.” 민서가 답했다. “거기, 지은 언니가 장치해 둔 라우터가 있어. 다음 증언 채널.”
카트가 어둠을 가르며 나아갔다. 천장에 매달린 조그만 조명들이 연속된 별처럼 지나갔다. 그 사이사이, 전광판에서 ‘청문’이라는 단어가 더 약하게 빛을 내며 꺼져갔다. 3분이 지나고 있었다.
민서는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이지은의 메시지. “봤어. 해냈어.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
민서는 화면을 잠그며 고개를 숙였다. 작은 웃음이 났다가 사라졌다.
“오빠가 자랑했으면 좋겠는데.”
태준이 옆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결심이 새겨져 있었다. 동시에 피로도. 그 사이, 태준은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작은 소리로 툭—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소한 기억 하나가 비틀려 빠져나가는 느낌. 어머니의 생일? 아니면 대학 시절 첫 계약서의 도장 소리? 정확히 지정할 수 없기에 더 불안했다.
“나… 뭔가 잊었어.” 그는 턱으로 단어를 끌어올리듯 말했다.
민서가 고개를 돌렸다. “삭제가 완전히 멈춘 건 아니야. 공증이 막아준 건 정화령이고, 너의 ‘진행률’은 낮아졌을 뿐.”
“그래도 버텨야지.” 태준은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우리가 한 번 공증했다는 사실은 남았어. 다음 증언으로 연결할 수 있어.”
카트가 급하게 멈췄다. 앞에 미닫이문이 나타났다. 수표모양의 구멍 사이로 바깥 공기가 스며들었다. 바닷냄새와 전선 냄새, 튀김 냄새가 뒤범벅이 된 냄새. 문을 열자, 오래된 시장 골목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떡볶이를 사고, 물건 값을 흥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 어디엔가 방금의 3분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속삭였고, 누군가는 휴대폰 연락처를 뒤적였다. ‘엄마’ 옆의 번호가 공란이 되어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표정.
민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도시, 두 개의 레이어가 겹쳐져 있어. 삭제된 기억의 도시와, 우리가 본 도시.”
“우리는 어느 쪽에 있지?” 태준이 물었다.
“기록하는 쪽.”
말 끝에, 휴대폰이 떨렸다. 이지은이었다.
— 위치 보냈어. 거기서 300미터. 하지만 조심해. ‘감사관’이 움직였어.
“감사관?” 태준이 되묻자, 민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화령이 실패할 때 쓰는 인간 대리자. 기록부의 손발. 오빠가 가장 경계하던 존재야.”
그 말은 예언처럼 골목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할 것 없는 검은 코트, 빛을 흡수하는 안경테, 표정이라기보다 표정의 윤곽선에 가까운 얼굴. 그는 걷고 있었다. 누군가를 향해 걷기 시작한 돌처럼.
민서가 태준을 바라봤다. “또 선택이야.”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택은 도망이 아니라 연결을 향한 선택이어야 했다. 또 하나의 증언, 또 하나의 공증. 기억을 건져 올리는 낚싯바늘처럼 문장을 던져, 도시의 입 안에서 빼내야 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낮게 말했다. “우리는 증언자다.”
그 말이 허공에 떠 있을 때, 감사관의 시선이 정확히 그 말을 향해 돌아왔다. 마치 발화된 단어가 좌표를 찍어준 것처럼.
밤이 내려오기도 전에 도시의 그림자는 진해졌다. 전광판은 다시 평온을 연기했지만, 사람들의 눈동자는 미세하게라도 달라져 있었다. 미세한 변화는 서랍 안에서 굴러다니는 못처럼 언젠가 발을 찌른다.
남포 반출구의 작은 낡은 포스터 뒤, 이지은이 적어둔 라우터가 숨겨져 있었다. 민서는 캡을 열고 케이블을 꽂았다. 터미널이 다시 작은 창을 띄웠다.
“이건 네가 열어야 해.” 민서가 말했다. “내가 네 목소리를 듣고 싶으니까.”
태준은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공포와 의심을 문장으로 치환하는 일. 살아 있는 증언을 구조화하는 일. 그의 직업이자, 이제 그의 방식의 싸움.
타이핑 소리는 빗소리처럼 일정했다. 어느 순간, 스피커 너머에서 이지은의 숨이 길게 이어졌다. “좋아. 두 번째 증언, 시작.”
그때, 골목의 입구에서 발소리가 늘어났다. 감사관. 그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히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몸을 크게 흔들지도, 무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발소리는 작은 메트로놈처럼 일정했다.
민서가 신호를 보냈다. ‘끝까지.’
태준은 문장을 마무리했다. ‘우리는 본다. 도시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인간을 지우는 순간을.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보존하기 위해 기록한다.’ 보내기. 엔터. 작은 소리가 났다.
상태창이 초록으로 변했다.
감사관의 그림자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들의 문장’을 듣는 사람의 눈빛. 잠깐, 그의 입가에 미소의 구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인간적인가? 아니면 훼손된 인간의 모사인가? 태준은 알 수 없었다.
“증언은 아름답습니다.” 감사관이 말했다. “그러나 질서는 더 아름답죠.”
민서가 대답했다. “질서를 위해 인간을 지우는 건—”
“질서는 언제나 소수의 삭제로 유지됩니다.” 그가 말을 꺾었다. “당신들이 지금 방금 구한 수많은 이름 중, 몇은 내일 또 지워질 겁니다.”
태준이 앞으로 걸어 나섰다. “그래도 오늘은 남았어.”
감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지의 표시 같은 고개. “그렇다면 내일 다시 오죠. 증언자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그는 돌아섰다. 발소리는 다시 메트로놈처럼 균일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일’이라는 단어를 남기고 사라졌다.
남겨진 공기는 묘하게 가벼워졌다. 잠깐이지만. 민서는 의자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이지은의 웃음이, 이번엔 조금 크게 들렸다.
“너희 둘, 멋있었어.”
태준은 라우터의 불빛이 안정적인 주기로 깜빡이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이 잊어버린 작은 기억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문장이 그 자리를 채웠다. ‘잊음과 싸우는 법을 아는 도시.’ 그는 그 문장을 마음속에 적었다.
“가자.” 민서가 일어섰다. “다음 증언을 위해.”
그들은 시장의 소음 속으로 섞였다. 이제 도시의 소음은 조금 달랐다. 재래시장 상인의 호객 소리, 달그락거리는 수레, 멀리서 들리는 버스의 제동음 사이로 누군가의 이름을 연습하는 낮은 목소리들이 섞여 있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세 번씩 부르는 사람들. 생존을 위한 주문처럼.
태준은 자신의 이름을 한 번 속삭였다. 두 번. 세 번. 목구멍을 지나 혀에 닿는 발음이 자신을 다시 붙잡았다. 그는 민서를 슬쩍 보며 웃었다. 민서도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인장처럼 잠깐 빛났다.
어딘가에서 다시 전광판이 깜빡였다. ‘청문 종료’라는 문장이 ‘공지 없음’으로 바뀌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0.8초. 하지만 그 사이에, 어떤 아이는 엄마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어떤 노인은 지나가는 청년에게 자신의 이름을 묻고,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사소한 전염. 그렇게 이야기는 번졌다.
태준은 문득 생각했다. 증언은 아마도, 이야기가 목숨을 얻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목숨을 얻는 순간, 누군가는 죽음으로부터 돌아온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3화 예고 ― 〈증언의 대가〉
확대 공개의 3분이 남긴 파장은 도시 곳곳에서 균열로 번진다. 기록부는 ‘정화령’을 보류한 채 더 정교한 반격을 준비하고, 감사관은 태준과 민서의 가장 가까운 기억을 표적으로 삼는다. 이지은은 불완전한 과거의 조각들을 꺼내 새로운 보증을 제안하지만, 그 대가로 누군가의 이름이 다른 누군가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박진호가 남긴 마지막 열쇠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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