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록부(웹소설)

9화. 사라진 이름들

gmast 2025. 8. 21. 10:35

9화. 사라진 이름들

불길은 마침내 잦아들었지만, 지하신도의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타들어간 금속 냄새와 그을음이 도시의 폐허를 뒤덮고 있었다.

강태준은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 서 있었다. 주변엔 울부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귀에는 이상하게도 정적만이 가득했다.
손에 쥔 USB는 이제 차갑게 식어 있었으나, 화면은 여전히 미약한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기록부 로그 2037-11-12 01:22]
사건: 지하신도 폭발
결과: 사망자 1,243명
삭제된 이름: 확인 불가 (자동 정리)
주석: “질서는 피 위에 세워진다. 이름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준은 숨이 막혔다.
“천 명이 넘는 이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그의 손이 떨렸다.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기록부가 스스로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자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민서의 고백

민서는 잿빛 연기 속에서 걸어 나왔다. 얼굴은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고, 눈빛은 공포와 분노로 번뜩였다.
“태준 선생님… 이제 아셔야 해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목에 걸린 작은 펜던트를 열었다. 안쪽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접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엔 어린 민서와, 그녀보다 조금 나이 많아 보이는 소년이 웃고 있었다.

“내 오빠예요. 이름은 김도윤.”
민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가 죽은 날, 관리자와 똑같은 남자가 현장에 있었어요. 폭발은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거였죠. 그리고 기록부에 도윤 오빠의 이름이 새겨졌어요.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삭제 예정’으로 기록돼 있었다고요.”

태준은 숨을 삼켰다.
“그렇다면… 네가 관리자를 알고 있었던 건….”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난 그날부터 이 도시에서 관리자의 그림자를 봐왔어요. 오빠의 이름을 지워버린 존재를 추적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난 그들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었죠.”


진호의 고뇌

박진호는 한쪽 무너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불길에 그을린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공허했다.
“이게 네가 말하던 질서냐…?”
그는 관리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나 관리자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태준이 다가가자, 진호는 피투성이 손으로 그를 막아섰다.
“태준… 이제 선택해. 너도 알겠지? 기록부의 힘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힘을 쥐는 게 유일한 길일지도 몰라.”

태준은 눈을 치켜떴다.
“너도 결국, 관리자의 편에 설 생각이냐?”

진호의 얼굴에 괴로운 갈등이 드러났다.
“나는 정의로운 형사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그 길이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지. 관리자는 내 약점을 꿰뚫었고, 난 타협했어. …이제 마지막 기회야. 난 더 이상 두 얼굴을 할 수 없어.”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그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태준, 널 쏠 수밖에 없게 만들지 마.”


기록부의 새로운 명령

갑자기 USB 화면이 번쩍이며 새로운 로그가 떠올랐다.

[기록부 로그 2037-11-12 01:37]
대상: 박진호
상태: 갈등
주석: “두 얼굴을 가진 자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결단은 기록된다.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증명하라.”

진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단을 내리라니. 결국 나를 시험하는 거군.”

그는 권총을 태준에게 겨누었다가, 다시 자신에게 돌렸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배신자일까? 아니면… 희생자일까.”

민서가 다급히 외쳤다.
“형사님, 총을 내려놔요! 관리자의 시험에 넘어가지 마세요!”

그러나 진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태준을 향해 무겁게 말했다.
“내가 선택을 해야… 네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라진 이름들

순간, 총성이 울렸다.
불길 속에 퍼진 굉음이 도시의 잔해를 뒤흔들었다.

태준은 충격에 몸을 움찔했다.
연기 속에서 박진호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끝에서 떨어진 권총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굴렀다.

USB 화면에 새로운 로그가 찍혔다.

[기록부 로그 2037-11-12 01:40]
대상: 박진호
상태: 삭제 완료
주석: “사라진 이름. 그러나 증언은 남는다.”

태준은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이제… 진짜로 이름까지 지워지는 건가….”

민서는 흐느끼며 속삭였다.
“박 형사님은 결국… 자기 이름을 스스로 기록부에 바친 거예요.”


10화 예고 ― 〈증언자의 운명〉

박진호의 죽음 이후, 태준은 기록부의 ‘증언자’로 선택된다.
민서는 오빠의 죽음과 관리자의 목적을 전부 털어놓으며 태준에게 마지막 선택을 강요한다.
기록부의 진짜 관리자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태준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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