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기록부(웹소설)

10화. 증언자의 운명

gmast 2025. 8. 22. 11:10

10화. 증언자의 운명

박진호의 죽음은 지하신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 파문이었다. 언론은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경찰 조직은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듯 조용히 넘어갔고,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는 듯 하루를 살아갔다. 오직 가까이서 그의 고집과 분투를 보아온 소수만이, 그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

강태준은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애도조차 허락되지 않는 죽음이라면, 그는 차라리 혼자 남아 술에 잠기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낡은 원룸의 탁자 위에 반쯤 비운 술병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그는 잔을 기울이면서도 박진호의 얼굴을 떨칠 수 없었다.

‘태준아, 네가 생각하는 정의는 결국 기록부 안에서만 존재할지도 몰라.’

그 마지막 대화가 자꾸 귓속을 울렸다. 마치 그의 영혼이 여전히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준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흔들었지만, 공허는 더 짙어졌다.


어느 순간, 노트북 화면이 깜빡였다. 문서 파일을 열어둔 것도, 검색을 돌린 것도 아닌데 화면 가득 검은 배경 위에 흰 글자가 떠올랐다.

 
[기록부 로그] 새로운 증언자를 선별합니다. 대상: 강태준 조건 충족. 역할: 증언자(Observer).

순간, 화면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듯 방 안이 번쩍했다. 태준은 눈을 가렸으나, 눈꺼풀 뒤로도 빛이 스며들었다. 몸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압박감이 찾아왔고, 정신은 공중으로 끌려가는 듯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사방이 금속 서가로 둘러싸인 거대한 아카이브.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마다 카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각 카드에는 이름과 날짜, 사건의 간단한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서가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푸르스름했고, 어딘가에서 기계음과 심장박동이 뒤섞인 듯한 소리가 울렸다.

“여기가…”

태준이 중얼거리는 순간, 정체 모를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환영합니다. 증언자.”

그 목소리는 인간의 따뜻함과 기계의 냉정이 뒤섞인 이질적인 톤이었다.

“왜 나를 여기로 끌어들였지?” 태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모든 것을 기록할 책임이 있습니다.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해야 합니다.”

대답은 단호했다. 이 공간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법정 같았다.

그러자 서가에서 카드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와 태준의 발 앞에 떨어졌다. 그는 망설이다가 카드를 집어 들었다. 순간, 카드가 스크린처럼 변하며 영상이 재생되었다.

화면 속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폐허가 된 건물, 그리고 쓰러져 있는 남자. 그는 박진호였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피투성이 얼굴이 카메라를 향해 돌아왔다.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미소 짓는 얼굴. 그 시선이 태준을 향한 듯했다.

“그만!” 태준이 절규했다. 하지만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 마지막 순간까지 새겨 넣으려는 듯, 기록부는 잔혹하게 영상을 반복했다.


“태준 씨.”

어디선가 현실의 목소리가 스며들어왔다. 그는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방 안, 작은 책상 앞에 이지은이 아닌 김민서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밤새 울었던 듯 충혈돼 있었고, 손에는 낡은 노트가 들려 있었다.

민서는 태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이제 숨길 게 없어.”

그녀는 노트를 펼쳤다. 빽빽한 글씨와 화살표로 이어진 다이어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조직도였다. 지하신도의 행정기관, 기업, 그리고 관리자의 이름이 의도적으로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

“오빠는 기록부의 내부 고리를 쫓다가 죽었어. 단순한 사고가 아니야. 관리자가 직접 손을 댄 거야.”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관리자의 정체는 우리 모두가 아는 사람이야. 하지만 지금 내 입으로 말하는 순간, 내 이름이 기록부에서 지워질 거야.”

태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넌 왜 이걸 나한테 털어놓는 거지?”

민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노트 귀퉁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오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 때문이야. 거기엔 당신 이름이 적혀 있었어. ‘태준에게 넘겨라. 그는 증언자가 될 자격이 있다.’ 그게 오빠의 마지막 말이었어.”

그 순간 태준은 숨을 고르지 못했다. 그의 선택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된 길이었다.


창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에서 또 폭발이 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비명과 방송 안내가 겹쳐 흘러들었다. 지하신도의 불안은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제 선택해.” 그녀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관리자를 막을 거야, 아니면 기록부의 증언자로 영원히 묶일 거야? 오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지금 결정을 내려야 해.”

태준의 가슴은 갈라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에는 박진호의 피 묻은 얼굴, 민서의 눈물 어린 눈동자, 그리고 기록부의 차갑고 무정한 음성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증언자는, 진실을 보는 자. 그러나 동시에 가장 먼저 죽는 자.”

민서의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태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어둠 속에서 다시 기록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선택받았다. 이제, 증언하라.”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정적은 곧 다가올 거대한 파국의 예고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11화 예고 ― 〈사라진 이름들〉

기록부의 권능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지하신도의 수많은 이름들이 한순간에 지워지고, 태준은 자신조차 목록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민서는 오빠의 죽음 뒤에 숨어 있던 더 큰 진실을 꺼내놓고, 관리자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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