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 사라진 기록
지하신도, E-13 구역 기록보관소.
형광등은 살짝 깜빡였고, 차가운 송풍구 바람이 낡은 종이 냄새를 밀어냈다. 강태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오래된 마이크로필름을 천천히 넘겼다. 화면 위로 흐릿한 활자가 흐르고, 어느 대목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포그 룸 살인—사망 추정시각 07:12, 목격자 無.”
지면은 분명히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경찰에 있을 때도, 그리고 은퇴 후 개인적으로 모은 사건 일지에도 이 제목은 자리잡은 적이 없다. 그 이름조차 낯설었다.
“이상하지.”
태준은 낮게 중얼거렸다. 몇 년 전 대규모 지하 화재 이후, 지하신도는 도시의 반쪽이 지하로 내려앉았다. 시스템은 더 복잡해졌고, 기록은 더 정교해졌다. ‘기록된 것’이 곧 ‘존재한 것’이 되는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여기엔 ‘있는데’ 어디에도 ‘없다’.
그는 노트북을 열어 전직 시절 남겨둔 계정으로 공공 데이터베이스를 조회했다. 윤리 규정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손가락은 이미 검색창에 ‘포그 룸’을 치고 있었다. 결과는 깔끔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빈 화면이 오히려 답답했다.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부재의 연출 같았다. 태준은 창을 끄려다 말고, 개발자 모드로 전환해 로그를 훑었다. 사소한 흔들림 하나가 눈에 밟혔다. 접근 기록 중 하나, 삭제 후 재인덱싱 흔적. 그리고 기묘한 주석.
“누가, 왜.”
그는 화면을 닫았다. 경험상 이런 ‘흠집’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 일부러 드러낸 흔적이거나, 급하게 지워서 남은 껍데기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 이지은.
“원고는요, 작가님.” 살짝 들뜬 목소리.
“오늘은 원고보다 질문. ‘포그 룸 살인’ 들어봤어?”
“포그 룸… 스튜디오 이름 같기도 한데? 어디서 봤어요?”
“여기, 기록보관소. 신문엔 있는데, 데이터엔 없어. 깨끗이.”
잠깐의 침묵. 이지은은 ‘흥미롭다’고 말할 때 항상 단어를 한 음절씩 끊는다.
“흥. 미. 롭. 네. 들어본 얘기가 하나 있긴 해요. ‘살인의 기록부’라는 도시전설.”
태준은 웃었다가, 웃음을 말아삼켰다. “전설?”
“모든 살인을 기록한다는 비공식 데이터베이스. 삭제도, 조작도 가능하대요. 누군가 그걸 쥐고 ‘증거’를 거래한다는 소문. 이름은… 그냥 다들 ‘기록부’라고만 부르더라.”
“전설은 원래 실체가 있어서 붙어.” 태준은 무의식중에 옛 말투가 나왔다.
“진짜면요, 작가님 차기작 소재로 딱이네. 대신—조심해요. 이 도시에서 ‘진실’은 가끔 제일 위험한 장난감이거든.”
전화를 끊고 나서도, 태준은 한동안 화면을 보았다. 경찰 시절 못 박듯 가르치던 원칙이 떠올랐다. 기록은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서 기록은 누군가의 의지대로 숨 쉬고 죽는 것 같았다.
그는 보관소 복도 끝 자판기에서 뜨겁고 싱거운 커피를 뽑았다. 돌아오는 길, 누군가 지나가며 그의 어깨를 아주 살짝 스쳤다. 무심한 군중 틈이었지만, 스친 감각엔 의도가 있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노트북 키보드 위에 작은 흰 봉투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았던 책상. 아무도 두지 않았을 봉투.
봉투 안에는 회색 먼지가 살짝 묻은, 손톱만 한 사진 한 장. 붉은 네온빛이 희미한 방—유리벽이 서리로 흐려진 공간. 구석에서 남자의 실루엣이 희번덕한 눈처럼 번진 빛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뒤에는 딱 한 줄.
회색 지문을 찾아.
지문? 그는 사진을 빛에 비춰보았다. 얼룩처럼 보이는 회색 반점이 유리벽에 넓게 번져 있었다. 얼음꽃인지, 손바닥인지, 아니면—.
그날 밤, 태준의 작업실은 어지럽혀졌다. 벽에는 오래된 사건 지도와 수사 사진들이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새로 얻은 사진은 정중앙에 붙었다. 그는 노트에 ‘포그 룸 살인—07:12’라고 적고 그 아래에 작은 사다리꼴 박스를 그렸다. 빈 박스들, 빈 칸들, 채워야 할 공백.
노트북의 전원이 꺼져갈 즈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 없음. 파일 하나가 딸려왔다. 텍스트.
기록부. 그 이름이, 스스로 그의 방에 걸어 들어왔다. 손끝이 굳어졌다. 발신지를 추적하려 했지만, 경로는 벌집처럼 분기하다가 벽처럼 막혔다. 누군가 숙련된 손길로 흔적을 지웠다. 마지막 노드엔 기묘한 서명이 남아 있었다.
— M
머리를 스친 이름이 있었다. 김민서. 정확한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경찰 내부에서 한동안 ‘유령 제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이름. 피해자일 수도, 내부자일 수도, 아니면 완전히 다른 누군가일 수도.
태준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지상은 보이지 않는다. 지하 도시의 밤은 층층이 내려앉는다. 수분 가득한 공기가 들어오고, 먼 곳에서 작게 구급차 경적이 울렸다. 그는 커튼을 젖히며 불 꺼진 건너편 창들을 훑었다. 그의 창을 마주하는 어딘가, 불도 켜지지 않은 칸에서, 미세하게—정말 미세하게—어둠이 움직였다.
“봐?”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면 보라고 연출된 건가.”
다음 날, 그는 E-9 단전구역으로 향했다. 지하 대정전 이후, 부분적으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구역. 그곳의 오래된 포토 스튜디오 중 하나가 ‘포그 룸’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패에 적힌 상호는 오래전에 벗겨진 듯 흐릿했고, 철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안은 차가웠다. 녹슨 레일 조명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방 한가운데 유리벽으로 된 촬영실이 있었다. 유리 표면엔 무수한 손자국과 얼룩이 층을 이루어 붙어 있었다. 그는 사진 속 얼룩과 유리 벽을 번갈아 보았다. 같은 결, 같은 패턴. 누군가는 여기에 손을 대고, 천천히 내려앉았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유리 위에 남긴 회색 지문.
발치에서 바삭한 소리가 났다. 박스 테이프 조각. 그가 허리를 숙였을 때, 유리벽 너머 스탠드 뒤에서 바람 한 줄기가 움직였다. 아니, 바람처럼 느껴질 만큼 조용한 발걸음. 누군가 뒤에 있었다.
“경찰은 아닙니다.” 낮고 평평한 목소리.
태준은 몸을 기울여 조용히 손을 들어 보였다. “나도요. 질문만 하러 왔습니다.”
어둠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후드 모자, 마스크, 눈가만 드러난 얼굴. 눈빛은 피곤했고, 오래 잠을 못 잔 듯 붉었다. 손에는 오래된 USB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거. 내게서 온 줄 알겠죠.”
“그럼 당신이— M?”
한 박 beat의 침묵. 상대는 어깨를 아주 조금 떨었다. “정답을 원하는 표정이네요. 하지만 오늘은 퀴즈만.” USB가 그의 손바닥 위로 옮겨졌다. “열면 죽을 수도 있어요. 안 열면, 더 죽을 수도 있고.”
“이름부터 물을까요.”
“이름은, 아직 기록하지 맙시다. 기록은 생각보다 빨라서, 지우는 데 오래 걸리거든요.”
그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유리벽에 잠깐 대었다. 마치 그 유리에 새겨진 무늬가— 과거의 누군가의 마지막 표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방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질문이 바뀌어야 해요.” 상대는 낮게 유리벽을 두드렸다. ‘똑’. “누구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았나.”
그때, 스튜디오 외부 복도에서 미세한 전류음이 들렸다. 꺼져 있던 표지등이 한 칸씩 켜졌다가, 다시 꺼졌다. 그 불규칙한 점멸 속에, 복도 끝에 서 있는 검은 형체 하나가 불빛에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상대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은—내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움직일 거예요.”
“그들?”
“‘관리자’라고 부르면 편하죠. 사실 이름은 매번 바뀌니까.”
문은 닫히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손바닥의 USB 하나.
태준은 귀에 손을 가져가 숨을 고른 뒤, 서둘러 스튜디오를 나왔다. E-9 구역의 공기는 더 축축했다. 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길목을 돌자, 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구급차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그 소리 속에서,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박진호.
“오랜만입니다, 강선배.”
“무슨 일이지.”
“그쪽, E-9에 있죠. 미리 말하지만, 공식 수사와 충돌하면 곤란해요. 그리고… 요즘 소문, 너무 깊이 믿지 마십시오.”
“‘기록부’ 말인가.”
“선배라면 알잖아요. 이 도시에선, 기록이 사람을 죽일 때가 있다는 거.”
전화는 그 말과 함께 끊겼다. 태준은 잠깐 멈춰 서서, 복도 반대편의 CCTV를 올려다봤다. 빨간 점이 켜졌다 꺼졌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기록하는가가 중요했다.
작업실로 돌아와 USB를 장치에 꽂았다. 화면엔 암호 입력 창 하나만 떠 있었다.
세 글자, 여섯 자리, 그리고 작은 힌트: “07:12를 기억하라.”
태준은 손가락을 멈추고, 벽에 붙인 사진을 바라봤다. 회색 지문이 빛을 먹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는 숨을 들이쉬고, 숫자를 입력했다.
엔터.
모니터가 깜박이며, 검은 화면 위에 텍스트가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방 불이 한 번 꺼졌다 켜졌다. 멀지 않은 창밖 어둠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틀림없이 움직였다.
[다음 화 예고]
“암호가 풀리자마자 울린 경고: watcher_online. USB의 첫 파일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목록’이었다. 그리고 그 목록의 맨 위에—강태준의 이름이 있었다.”
'살인의 기록부(웹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6화. 균열의 시작 (8) | 2025.08.18 |
|---|---|
| 5화 . 가짜와 진짜 (4) | 2025.08.18 |
| 4화. 그림자의 언어 (18) | 2025.08.17 |
| 3화. 조각난 증거 (11) | 2025.08.15 |
| 2화. 추적의 시작 (16) | 2025.08.13 |